친일청산!!!

[스크랩] 김완섭 욕먹어도 싼가?

간큰사내 2006. 8. 13. 15:59

김완섭, 많은 분들이 이사람을 희대의 매국노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된 책의 내용을 여러분들이 직접 읽어보시고 정말로 김완섭이란 사람이 욕을 먹어도 싼가를 직접 판단하세요.

 

다음은 문제가 된 김완섭의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 중에서 quote 했습니다.

 

" 민비와 조선말기 친일파 애국자들

한국인들이 일본을 비난할 때 곧잘 인용하는 사건이 1894년 일본인들에 의해 민비가 살해된
사건이다. 이걸 을미사변이라고도 하고 최근에 정착된 공식적인 명칭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일을 가지고 한국의 우익들은 마치 민비가 지네 어미라도 되는 양 국모를
죽였다고 통분해하며 일본을 비난하는 것이다. 나라야 어찌되든 지네 목숨 부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일본에 붙었다 청나라에 붙었다 하면서 개혁을 가로막았던 미친
불여우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과의 합병에 의해 조선왕조가 무너진 사건을 망국이라고 표현하고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높여 부르며 고종이 최후로 강대국한테 빌붙어보려고 보냈던 밀사 이준을
열사라고 칭송하는 등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데에는 교육과 미디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즘에도 남한의 한 전국방송에서는 민비의 일대기를 그린 명성황후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인들은 왕족들에게 공감을 느끼고 마치 자신이
조선의 왕이나 왕비의 후손이라도 되는 듯 지배층의 입장에서 조선말기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맨날 왕자와 공주만 등장하는 만화 탓인지 젊은 것들은 너나할것없이
공주병 아니면 왕자병 증세가 있는 환자고, 전 국민의 100%가 본관을 가지고 족보를 가진
조선 양반집안의 후손이고 믿고 있는 한국인. 족보는 대부분 상놈살이에 한이 맺혀
조선말기와 일제시대에 돈주고 사거나 조작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쨌든
한국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의 절대 다수가 조선 사회에서 양반이 죽이면 그냥 맞아죽어야만
했던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민비의 본관은 여흥이고 성이야 당연히 민씨겠지. 경기도 여주에서 증조할아버지가 영의정을
지낸 굉장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빌빌대다가 9살 때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13살 어린 나이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에 의해 왕비에
간택되어 궁중으로 들어갔으나 마마보이에 파파보이였던 병신머저리 고종과는 스타일이 안
맞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같이 성교 할 기회가 없으니 당연히 애를 못 낳을 수밖에. 그러다
고종이 친하게 지내던 궁녀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나중에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고종은 나이가 들면서 미인의 관점이 성숙해지자 민비에게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
즈음 민비도 장안의 섹시 미남들을 불러다들여 은밀히 동서고금의 온갖 방중술을 익힌 덕분에
고종을 밤마다 뿅 가게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점차 고종의 애정을 독점하여, 1871년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원자(왕의 첫째부인이 아들을 부르는 명칭)를 낳았으나 그만 5일 만에 깨골락
죽어 버렸다. 나중에 이 사건이 흥선대원군이 가져다준 산삼 때문임을 알게 된 민비는 더욱
대원군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게 되었다.

1873년 일본에 이 기회에 조선을 먹어버리자는 정한론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건축사업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민비는 대원군을 몰아내기 위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한다. 그 결과
흥선대원군 일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도록 만들어
드디어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민비는 쇄국정책을
마감하고 1876년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경기도 충청도 지방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이 선포된 것을 알고 고종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한편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민비는 청나라 군대에게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한
다음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이후 민비는 유랑생활 중 한층 업그레이드한 ***
테크닉으로 고종을 뿅가게 만들어 놓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대원군 일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일본과 결탁한 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갑신정변) 잠시 정권을 잃었으나 다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세력의 집요한 침투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되고 1894년 청나라에서
돌아온 흥선대원군에 의해 본격적인 체제 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는 1894년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 민비를 죽인 뒤 시체를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상이 간략한 민비의 일대기인데, 조선말 긴박한 시기에 정치의 전면에 나서 처음엔 일본에
붙었다가 나중엔 청나라에 붙었고 마지막엔 러시아에 붙는 등 주로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고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악질반동 매국노임을 알 수 있다. 민비의 결정적인 악행은
권력을 유지하려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치부를 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혁에 극렬하게 저항했다는 것이다. 이런 년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나름대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행동이었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말기 운요호 사건 이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인 주인 없는 땅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보호국이던 청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 망해가고 있는 중이었고 조선의
지배층은 개항 이후에도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어 사실상 현대식 무기를 가진 군대는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 시기 조선반도 점령에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청,
러시아였다. 나머지 서구열강들은 교역과 세력확장을 위한 교두보와 경제적인 이권 정도를
탐했을 뿐 조선의 점령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는 물론 전통적인 속국이었던
조선을 계속해서 영향력아래 두거나 이 기회에 아예 청나라 영토로 편입하기를 원하였고
러시아는 전 역사를 통해 숙원이었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조선반도 점령에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반도를 원하던 이유는 임진왜란 때와 같았다. 그들에게는 대륙진출을 위해 조선반도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이 3 나라 가운데 일본이 가장 빠르게 발전해 국력을 키웠고 적극적이었던
일본이 결국 조선반도의 주인이 되었는데, 일본은 20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청나라와 러시아가
거의 동시에 내부혁명으로 인해 붕괴되고 있던 시기에 힘의 공백을 틈타 조선을 일본영토로
합병할 수 있었다.

청 조선 일본 3개국은 19세기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오랜 기간동안 쇄국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시기에 굴욕적인 강제개항을 하게 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하면서 1842년 국제사회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은 1854년 조선은 1876년에 각각
개항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일본만이 14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끝에 급진개혁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에도 막부시대를 종식한 뒤 아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헌법을 도입하고 서구식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메이지유신) 개항시기 일본의 천왕은 지금처럼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모든 권력은 도쿠가와 막부에게 있었는데 이것이 격변기에 개혁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이 시기 청나라와 조선에도 나름대로
개혁세력이 존재했으나 왕실의 권력이 강했던 탓에 일본과 같은 신속한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조선의 개화파는 1870년 경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이어받은 박규수, 유홍기 등 중인계층이
중심이 된 개화 1세대가 생겨났고 나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양반가문의 엘리트들을
포섭함으로써 1880년대에는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대부분 친일파였던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빌붙어 정권을 재장악한 민비에 의해 탄압을 당하자 향후 노선을
두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이는 비슷한 시기 러시아의 혁명세력이 온건 멘셰비키와
급진 볼셰비키로 나뉘어진 것과 비슷한 일이다.

김홍집이 이끈 온건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파와
타협 아래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과학기술문명만을 받아들여, 개혁을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고 청과는 종래의 사대외교를 계속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온건개화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기본적으로 청에서 실시하고 있던 양무 개혁파와 비슷하였다.
이에 반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한국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근대적인 정치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수구파인 민씨 정권을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의 수립을 위해서도 청에 대한 사대관계를 종식시켜 조선의 독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상 급진파만이 실질적인 개혁세력이었고 이후 이들은
개화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화당은 임오군란 이후 사이비 개혁파와 민씨 일파, 청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 위기에
몰리게 되는데 1884년 5월 청과 프랑스가 베트남 문제로 충돌해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가운데 1,500여 명이 철수하고 8월에 청불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이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던 일본이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정변과 이후 개혁작업에 필요한 군대와 차관문제에 호의를 보이자, 마침내
1984년 음력 10월 17일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쿠데타 정권은 청군의 공격과
일본의 배신으로 인해 3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개화당 수뇌부가 청군에게
사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은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갑신정변을 배후조종했다는 국제적인 비난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는 일본에서 10년을 전전하다 청나라로 건너가
1894년 3월 민비가 보낸 자객에 의해 상하이에서 살해되었다. 개화당은 1895년 민씨 정권이
몰락하고 친일갑오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면을 받고 관직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돌아온 박영효는 갑오정권에 참여하여 을미개혁을 주도하였고,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당의 맥을 계속 이어갔다.

조선말기 개화파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왜 봉건제도 아래의 일본만이 자체적으로 서양식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개혁파들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일어나 막부에 대항했는데 이 당시 일본의 각 번은 독자적인 군주와 영토,
군대를 가진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의 존왕파 개화당은 스스로 무력을 가지고 뜻을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모든 군사력과 행정력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던 조선과
청나라의 개혁운동은 앞선 지식과 사상을 지닌 엘리트 개혁세력과 무력에 의존한 하층 계급의
폭동이라는 양 갈래로 분리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개화당이 일찍이
무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동학운동세력과 연합할 수 있었다면 조선에서도 일본식 유신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것이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말기 애국 개화당에게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이었고
이들은 조선을 일본의 선례에 따라 개조해 부강한 자주독립국을 만들고자 했지만 사실상 이는
당시 국제정세에 비추어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따라서 일본식의 개혁을 추구해 조선을
근대사회로 변모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의 일부가 되는 길뿐이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의
왕족은 사실상 나라가 망한 시점에서도 대한제국이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을 연명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발버둥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위대한 혁명운동이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고 그들의 종교 이념상 중앙의 엘리트 개화당과 연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가 불기피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개화와 근대화가 주요 과제였던 조선말기에는
친일파만이 유일한 조선의 애국세력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1910년 한일합병 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등 친일파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82년 과거 시험에 응시 병과로 합격하여 검교, 수찬,
해방영군사마 등 주로 군 관련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한 사람이다. 과거에
합격하기 한 해 전인 1881년에 당시 유일무이한 서양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는 등 서양학문을 학습한 몇 안 되는 관리였던
탓에 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지내면서 나중에 순종이 되는 세자의 측근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벼슬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승승장구, 1887년에는
미국참사관이 되어 미국에 건너가 선진 사회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 외무참의를 역임하였다. 1888년 12월 미국 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90년 귀국하였다. 1895년에는 오늘날의 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친러파로서 외부대신겸 농상공부대신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에는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일본의 사주를 받고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는데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이라는 자객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몸이 난자 당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 후작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글씨를 잘 써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알려진 이완용의 행적을 간단히 요약한 것인데, 그나마 모욕적인
표현들을 많이 줄이고 삭제한 끝에 얻어진 문장이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앞장서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들이 이름 있는 국사학자들에 의해
언급되는가 하면,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 한국 역사에서
이완용처럼 억울하고 부당하게 평가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완용은 우리
역사에서 다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깊이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기 때문이다.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은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잘 써 훗날에는 당대 제일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는데, 지금 남아 있는 독립문의 현판도 이완용의 쓴 것이다.
24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개화기에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외국어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육영 공원에 들어가
1886년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이듬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갔으나 1년 만에 병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미국에 건너가 대리 공사로 승진하는
등, 당시 몇 안 되는 미국통이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과 힘을 합쳐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이완용이 얼마나 신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애국자였는가는 서재필이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 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여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 씨가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정부에서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으나 리완용 씨가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자기 힘껏 그 일을 방어할 양으로 하다가 필경 일은 자기
경영과 같이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또 갈린 탁지 대신 박정양 씨도 리완용 씨와 같이 칠만한
재상이라‥‥‥

1897년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천도'를 했던 머저리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국내외 정세가 혼미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이권을 쟁취하려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내각의 장관이었던 이완용은 목숨을 걸고
외세와 매국노들에게 대항하여 조선의 이익을 수호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에서 급진 개화파의 선두였던 서재필이 1895년 12월에
귀국해서 민초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신문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독립신문 창간 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을 정도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와
더불어 구한말 대한 자주독립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언론인 것이다.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 독립협회는
고종환궁운동을 한창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 정치가들은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한
이완용이 장관직을 잃고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 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고 또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서........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
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을 지녀
회원들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용어를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98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을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격돌하였다. 조차는 외국의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하던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영도 조차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입법기관인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 일본은 수구파에 가담, 고종에게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했다. 이를 받아들인 고종은 곧바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애국자였다. 과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
왕권 유지에 눈이 멀어 개혁을 탄압했던 부패한 고종이었을까, 아니면
독립협회를 이끌어 목숨을 걸고 자주독립의 길을 갔던 이완용일까?

흔히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말들을 하지만, 사실 역사도 끝난 바둑처럼
복기를 하면서 검토해볼 수 있는 대상이다. 만약 구한말 독립협회가 추진했던
입헌군주제가 성공했다면 그 뒤 대한제국은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 아마도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세력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러시아-프랑스-독일의 동맹과
일본-영국-미국의 동맹이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러일 전쟁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전쟁비용의 대부분을 제공하면서 일본을
지원하였고 일본은 그 때문에 군사강국 러시아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후유증으로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짜르는 축출 당하고
제헌의회가 소집되기에 이른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대국들의 묵인아래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혁명의 와중에서 러시아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져버렸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청나라도 1900년 의화단의 반란을 계기로 대륙 전체가
혁명기에 돌입하게 되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이 같은 국제 정세 아래에서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막을만한 세력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입헌군주제 운동이 실패 한 뒤 만고의 애국자 이완용은 고독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을 새로운 지배자로 선택하는 일에
협력하게 된다면 아직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것만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완용의 시대에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완용.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

원치 않는 결과

일본의 역사 왜곡으로 나라가 온통 분노로 들끓고 있다.
정부에서는 연일 강경대책을 발표하고, 모처럼 정치권도 초당적으로 하나 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방방곳곳에서 국민들의 분노의 큰 함성이 멈추질 않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소련의 KAL기 폭격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불현 듯 18년 전 소련의 KAL기 폭격 사건이 연상된다.
그 당시 소련은 민간여객기임을 인지하고도 동여객기가 자국의 영공에 침범했다는 이유 때문에 무자비하게 폭격을 가했고 수백명의 무고한 목숨이 처참하게도 차가운 북태평양에 수장되었다.
소련의 천인공노할 무자비한 만행은 국민들의 분노감을 촉발케 했고, 소련의 만행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전국 규모의 대회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군사적 초강국 소련은 우리 국민들의 들끓는 분노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국민들의 격노와 분개는 찻 잔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어느 시점에 국정최고책임자가 저녁 메인 뉴스를 통해 ".....그러므로 국력을 배양해야 합니다."라고 기운 없이 말할 때 이미 대다수 국민들은 군사강국 소련의 힘 앞에 어쩔 수 없음을 인식했고, 허탈감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켜야 했다.

정신적 폭격은 더 큰 아픔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 왜곡은 상징적 의미로 볼 때 경제강국인 일본이라는 제2의 소련이 한국민의 자존심이라는 민항기에 역사 왜곡이라는 폭격을 가한 것이다.
역사 왜곡은 정신적 폭격이며 오히려 소련의 물리적 폭격보다 상처와 아픔이 더 크다.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물리적 상처를 받은 것은 쉽게 치유가 가능해도 정신적 상처를 받게 되면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어떤 경우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하는 예가 종종 발생하는데 바로 그 이치와 다를게 없다.
그래서 국민들의 분노가 소련의 그 때보다 더 강하고 세차다.
불과 몇 년 전에 한·일 공동파트너쉽을 만천하에 선언한 후에 벌어진 일이어서 특히 분노가 더 하다.
이런 한국민들의 들끓고 있는 반일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이즈미는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공언하고 있고, 문부성은 문제의 역사 교과서 수정은 더 이상 없다고 못을 박고 있으며, 일본의 유력 언론사들은 일본정부의 의견을 적극 옹호하고 있고,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 교과서를 채택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소련이 나타낸 것과 유사한 반응 - 철저히 무시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불길한 예감

역사 왜곡 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지금, 우리 모두는 일본이 우리에게 사과하고 우리의 수정 요구를 전면수용해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바로잡은 역사를 일본 국민들에게 교육하는 방향으로 결론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다음 사항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결론, 불길한 예감이 든다.
⇒ 세계적 흐름
① 일본은 미국의 세계경영 전략상 우리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가치를 갖고 있다.
② 세계 흐름이 미국을 비롯하여 보수적,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③ 냉혹한 국제 관계에서는 오직 자국의 이익 즉 실리만 있을 뿐이다.
④ 중국이나 북한의 목소리는 세계를 그리 크게 공명시키지 못하고 있다.
⇒ 일본의 상황
① 역사 왜곡의 최정점에 사상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극우적 인물인 고이즈미가 있다.
② 일본내에서 왜곡된 역사를 수용하는 분위기가 높은 점이다.
③ 일본이 동아태 지역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자하는 야욕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④ 여러 가지로 단합된 모습을 과시하고 있다.
⇒ 우리의 상황
① 최악의 지지율을 얻고 있는 국정최고 책임자
② 조선 시대의 당파 싸움을 무색케하는 첨예한 정치적 대립
③ 지역당 공천을 받으면 말뚝도 당선되는 망국적인 지역감정
④ 집권측과 언론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사활을 건 투쟁
⑤ 병든 시스템과 기대에 미흡한 운영자
⑤ 집권여당의 잦은 실정에 따른 최악의 민심이반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역사 왜곡에 대한 우리의 격분과 분노가 또다시 찻 잔 속에 태풍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그렇게 되면 진정 좋겠지만-으로 결론이 날지 의문스럽다.
또 다시, 18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므로 국력을 배양해야 합니다."라는 자조적인 말을 듣게되지나 않을지 허탈해진다.
삼척동자도 계시하건데 위에서 언급한 문제투성이인 우리의 상황을 철저히 개선하지 않고는 앞으로 10년, 20년, 아니 100년이 지나도 군사적 강국이든, 경제적 강국이든, 문화적 강국이든 그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폭격을 가할 때 여전히 "...그러므로 국력을 배양해야 합니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말을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출처 : 생활에 유익한 정보 나눔터
글쓴이 : lagoodguy 원글보기
메모 : 1.김완섭의 주장을 읽고 대응방안을 논의하자
2.유태인 학살이나 유태인 수용소 내 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하는 발언을 할 경우 법에 의해 엄격한 처벌을 하는 프랑스와 달리 ‘일제 강점하 민족차별옹호방지법안’이 여전히 국회통과를 기다리고 있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친일 발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짚어보자